아메리카노

'역사상식 (용어)'에 해당되는 글 54건

  1. 제1공화국 탄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
  2. 인도 카스트 제도 4가기 계급 신분 제도
  3. 불야성 뜻 유래
  4. 카스트로와 체 케바리의 쿠바 혁명
  5.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유래
  6. 말짱 도루묵 뜻 유래
  7. 나쁜일의 근거지 복마전 뜻 유래
  8. 독일의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9. 아비뇽 유수 란 교황청의 프랑스 아니뇽으로 이전
  10. 제갈량 출사표 유래 뜻
  11.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화 창조 르네상스 뜻
  12.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 삼부회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의원
  13.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영국의 대헌장 ( 마그나카르타 )
  14. 삼별초 대몽항쟁
  15.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 ( 테무친)
  16. 동서로 교회 분열 ( 시스마 )
  17. 일본의 막부 정치 란
  18. 프랑크 왕국 분열 분할 베르됭 조약
  19. 노르만의 영국 정복
  20. 소설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장편 소설
  21. 마지노선 뜻 유래 마지막 한계선
  22.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23. 마호메트 ( 무하마드 )의 이슬람교
  24. 고구려 광개토대왕 요동정벌 (역사상식)
  25.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
  26. 우리나라에 온 부처님 불교의 유래
  27. 진시황제 그리고 분서갱유
  28.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례의 전쟁
  29. 크리스트교의 공인 밀라노 칙령 이란
  30. 걸프 전쟁 이아크의 쿠웨이트 침공 다국적군과의 전쟁

제1공화국 탄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역사상식 (용어)

제1공화국 탄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신탁 통치안이 반대에 부딪히고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우니라나의 독립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합니다.

 

미국은 유엔 감시하에 한반도에서 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소련이 반대했으나 1947년에 가결되어 ,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와 정부 수립, 미.소 양군 철수를

위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자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먼저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하도록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한 단독 선거럴

실시할 경우, 조국이 남북으로 영구히 분단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남북 협상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948년 5월10일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리하여 7월17일에 헌법이 공포되고

제헌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한 뒤 ,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 북한에서는 1948년 9월9일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발하여 남북 협상파인 김구와

김규식, 중립계 정치인, 좌익 세력들은

5월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인도 카스트 제도 4가기 계급 신분 제도

역사상식 (용어)

인도 카스트 제도 4가기 계급 신분 제도

 

 

 

 

 

카스트 제도란

인도 사회의 특유의 전통적인 4가지 계급의 신분

제도를 말합니다.

 

 

기원전 13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엄격한 세습적

계급 제도 입니다.

 

 

이 제도에는 브라만 (승려), 크샤트리아 (왕족와 무사),

바이샤 (평민), 수드라(노예)의 4계급이 있습니다.

각 계급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지며

절대 다른 계급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또한 계급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결혼도 할 수 없고

직업이나 식사 및 관습등도 그 속한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됩니다.

 

나중에 계급은 더 세세히 나누어져서 약 3000여 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카스트 제도는

인도 독립 후인 1950년에 헌법으로 막고 있지만

아직도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어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 인도는 특히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카스트 제도에 따른

갈등, 지나친 빈부 격차, 실업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불야성 뜻 유래

역사상식 (용어)

불야성 뜻 유래

 

 

 

 

불야성은 등불 따위가 휘황하게 켜 있어

밤에도 대낮같이 밝은 곳을 말합니다.

이 말은 중국의 "삼제략기", "한서지리지"등에 나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삼략제기"를 보면

"양천 동남쪽에 있는 불야성은 밤에도 해가 떴으므로

예로부터 성의 이름을 불야 하고 부르고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였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불야성은 중국 한나라 때 밤에도 해가 떠서

밝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지금의 산둥성에

있는 불야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책에서 비롯하여 지금은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켜 있어 밤중에도 대낮같이 밝은 번화한

도심의 거리를 가리키거나, 때로는 경재 상황이

좋은 경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카스트로와 체 케바리의 쿠바 혁명

역사상식 (용어)

카스트로와 체 케바리의 쿠바 혁명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국이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미 군정을 거쳐

20세기 초에 독립을합니다.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티스타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 정치를 하였습니다.

 

 

바티스타 정권의 부정부패와 탄압이 심해지자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리하여 1953년에 동지들을 모아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체포됩니다.

 

 

1955년에 특사로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을 하였고,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만나 게릴라 훈련을 한 뒤

함께 쿠바로 갔습니다.

 

 

1956년에 배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였으나 , 정부군의 추격으로

간신히 10여 명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산악 지대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며 동지들을 모았습니다.

 

 

그 뒤 많은 쿠바인들이 독재 정권에 등을 돌로

혁명군에 가담하였고,

마침내 1959년에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어 카스트로는 농지 개혁과 외국 자본을 국유화한 뒤

사회주의를 채택하여, 쿠바를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공산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 카스트로의 반미와 사회주의 정책은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기쳤다.

 

 

*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 하자,

미국이 해상 봉쇄를 하는 등 강력히 맞서며

전쟁 직전까지 가는 "쿠바 위기"가 있었으나

소련의 포기로 진정되었다.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유래

역사상식 (용어)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유래

 

 

 

 

원래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전이었습니다.

여러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민족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기 위하여 4년에 한 번 올림피아에 모여

신전에 참배하고 운동 경기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고대 올림픽은 4세기 말레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르네상스를 거치며 고대 그리스를 재현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올림픽 부활 운동이 생겼고

19세기에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본격화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은 1894년 파리 국제 스포츠

회의에서 세계 평화를 위하여 근대적인 올림픽을 제안했습니다.

 

이 안건은 유럽의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어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IOC)가 설립됩니다.

 

 

그리하여 제1회 국제 올림픽 경기 대회는

1896년 4월5일에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참가국은

독일.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유럽 국가에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등 총 13개국으로 여성 참가자가 한 명도 없었던

작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성공리에 개최되어 미국의 우승으로 끝났고,

제2회 올림픽은 4년 뒤인 190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 올림픽기인 오륜기의고리 5개는

유럽. 아시아. 아프피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의 5대

대륙을 상징한다.

 

 

* 우리나라는 19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말짱 도루묵 뜻 유래

역사상식 (용어)

말짱 도루묵 뜻 유래

 

 

 

 

 

" 말짱 도루묵 " 이란

열심히 노력한 일이 보람도 없이 무산되었을 때

쓰는 말 입니다.

 

 

 

 

 

 

도루묵은 우리나라 근해와 일본 등에

분포하는 바닷물고기로 목,은어라고 합니다.

 

이 도루묵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임재왜란 때 피난을 가 변변한

찬이 없이 식사를 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한 어부가 "묵"이라는 물고기를 바쳤습니다.

 

선조 임금은 묵을 먹어보고 너무 맛이 좋아

그 물고기에게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나 궁궐에 돌아온 선조 임금은

문득 피난길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 맛이 없었습니다.

이에 선조 임금은 " 그 물고기를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로 인해 소득 없이 헛일이나 헛수고가 된

경우를 말짱 도루묵 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나쁜일의 근거지 복마전 뜻 유래

역사상식 (용어)

나쁜일의 근거지 복마전 뜻 유래

 

 

 

 

복마전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

이라는 뜻으로,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악의 근거지 라는 말입니다.

 

 

 

시내암이 쓴 소설 (수호지)에서 비롯된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북송 때,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자

황제는 한 신하를 시켜 산에서 도를 닦는 도사에게

전염병 퇴치를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명했습니다.

 

신하는 도사를 찾아갔다가

"복마지전"이란 간판이  달린 전각을 보았습니다.

신하는 안내인이 말리는데도 갑자기 큰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도니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때 도사가 나타나 "그곳은 마와 108명을 가두어 둔

곳이오. 이제 세상에 나왔으니 그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이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정말로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복마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의 소굴을 말합니다.

또한 부정부패, 비리의 온상지를 뜻하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독일의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역사상식 (용어)

독일의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독일은

분할 점렴을 합니다.

1949년에는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지인 서쪽을 통합하여

서독을 세우자, 소련도 동독을 세워 독일은 분단이 되고맙니다.

 

이어 냉전 체제가 계속되면서 서독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원칙"을 내세워 동독과 긴강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1969년에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을

국가로 인정, 동유럽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 하는

"동방 정책"을 펴면서 통일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그 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자유와 바람이 일자, 1989년 독일의 통일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합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에 자유와 개방화,

자유 선거 실시를 요구하며 경제 원조를 약속했습니다.

이어 동독에서는 민주와 시위로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나고 11월에는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결국 동독에서는 첫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고

총리가 된 메지에르는 마르크와 통일과 국경 개방을

실시하여 통일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독일은 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의 승인을

얻어 마침내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합니다.

 

 

 

 

 

* 통일에 기여하였던 헬무트 콜은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아비뇽 유수 란 교황청의 프랑스 아니뇽으로 이전

역사상식 (용어)

아비뇽 유수 란 교황청의 프랑스 아니뇽으로 이전

 

 

 

아니뇽 유수 란

 

1309년 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한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6세기에 유대인들이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간

바빌론 유수 (잡아 가둠) 사건에 비유하여

이름 붙인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실패한 후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는

점점 약회되었고, 왕권은 점점 강화 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을 습격하여

굴복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프 4세에 의해 1305년에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결국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강요로 1309년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7대에 걸쳐 교황은 아비뇽에 머물며

내내 프랑스 왕의 간섭을 받았고

호화 스러운 교황청까지 지었습니다.

 

 

그러다 1377년에 고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감으로써

교황의 아비뇽 유스 시대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후 아비뇽과 로마 교황청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의 권위는 더욱 떨어지고

교회의 타락은 날로 심해졌다.

 

* 아비뇽 유수 이후 교회의 분열로 로마와 아비뇽에

2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립 교황 시대가 40년간 이어진다.

 

 

 

 

 

 

 

 

제갈량 출사표 유래 뜻

역사상식 (용어)

제갈량 출사표 유래 뜻

 

 

 

 

출사표 란

 

중국 삼국 시대 때 촉나라의 재상인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기에 앞서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을 말합니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 정비를

끝내고 유선에게 황제로서 지켜야 할 것,

충신의 추천, 유비와의 애뜻한 관계 등

우국 충정이 담긴 글을 써서 바쳤습니다.

 

 

촉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여 쓴 이 출사표는

제갈량의 우국의 진심이 잘 나타난 정열적인

글로 최고의 명문장으로 유명 합니다.

 

 

이후 출사표는 장수가 출병할 때에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던 글로 쓰이다

요즘에는 흔히 어떠한 큰 일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밝힐 때 주로 쓰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화 창조 르네상스 뜻

역사상식 (용어)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화 창조 르네상스 뜻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퍼진 문예 부흥 운동 입니다.

 

중세기 크리스트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자유롭고 풍부한 인간성을 부흥하고자

주장하면서 개인의 존중과 개상의 해방

등을 중요시했습니다.

 

 

 

르네상스는 "재생"  또는 "부활" 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 중심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은 중세로 사람들의

눈과 귀는 신과 종교라는 절대적인 개념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세를 암흑기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사고는 경직되었고

예술은 자유를 잃었으며 ,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13세기 후반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탈리아에는

특유의 시민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부유하고 멋을 즐길 줄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종교적인 고리타분함을 넘어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 화려했던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을 부흥시키고 새 문화를 창출해 내자는 움직임,

르네상스가 자연스럽게 전개된 것입니다.

 

 

 

 

* 그리스.로마의 고전 작품을 연구하는 기풍을

인문주의 (휴머니즘,인본주의) 라고 하는데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정신적 태도나 세계관을 말한다.

 

 

 

*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은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이다.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 삼부회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의원

역사상식 (용어)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 삼부회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의원

 

 

 

 

 

" 삼부회 "란

프랑스에서 1302년에 처음 실시한 성직자 . 귀족 . 평민 출신

의원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를 말합니다.

 

 

13세기 말부터 왕권을 강화한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교회에 많은 세금을 내게 하고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반발하여 서로

대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지 필리프 4세는 성직자.귀족.평민 각 대표를 뽑아

노트르담 성당에 모이게 한 뒤 이들의 지원을 받아

교황을 굴복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삼부회의 시작입니다.

 

 

 

 

 

 

프랑스 삼부회는 왕을 견제하는 영국의 의회와 달리

왕권의 주도로 열려 왕의 일에 협조하는 일종의

자문 기관 성격이었습니다.

 

그래도 국민의 대표회의 성격을 띠고 있어 국가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종종 열리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1 신분인 성직자와 제2 신분인 귀족은

중요 관직을 차지하며 세금을 내지 않는 특급 계급이고

제3 신분인 시민과 농민들은 세금을 많이 내면서도

정치 참여가 보장되지 않아 서로 대립이 잦았습니다.

 

 

이후 절대 왕정이 확립되자 삼부회는 1614년 루이 13세 때

열린 이후 170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루이 16세 때인 1789년에 베르사유 왕궁에서

개최되지만 혁명이 일어나 사라지게 됩니다.

 

 

 

* 삼부회의 소집권와 의제의 선정 권한은

모두 왕에게 있다.

 

 

* 삼부회는 신분제 의회였지만 1789년에 제3 신분인

평민들이 만든 국민회의를 통하여 근대적 의회

성립의 모태가 된다.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영국의 대헌장 ( 마그나카르타 )

역사상식 (용어)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영국의 대헌장 ( 마그나카르타 )

 

 

 

 

 

십자군 정쟁 이후에 황권이 강화되자 귀족과,성직자,

시민들은 왕권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견제하려고 하였습니다.

 

 

영국에서도 왕권이 강했는데,

존 왕은 지나친 세금과 군역 요구, 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등 실정을 계속하여 귀족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1215년에 귀족들은 왕권의 제한과 귀족들의 권리 확인 등이

담기 "대헌장" (마그나카르타) 을 존 왕에게 강요하여

승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교회의 자유,

봉건 별률의 확인, 부당한 세금 징수 반대, 법률과 사법 제도의 개혁,

상인의보호, 왕이 거느린 용병의 해산 등이었습니다.

 

사실 대헌장은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인 문서로

강요에 의해 탄생했지만, 이후 국왕의 권력에 맞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헌장으로 인하여 영국 사람들은 국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법 아래에 있다는 원칙을

새롭게 확인하였습니다.

 

 

17세기에는 압제와 폭력에 항거하는 하나의 상징 구호가 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협받을 때마다

그에 맞서 대헌장의 이념을 외치곤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대헌장은 영국 입헌제의 기초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존의 아들인 헨리3세는 대헌장을 무시하다

몽포르의 반란으로 굴복하고, 영국 최초로 귀족과

시민 대표들로 의회를 열었다.

 

 

* 대헌장은 권리청원,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입헌제의

기초가 되었다.

 

 

 

 

 

 

 

삼별초 대몽항쟁

역사상식 (용어)

삼별초 대몽항쟁

 

 

 

 

고려 정벌 기회를 엿보던 몽골은 고려에 파견한 사신

저고여가 국경 지대에서 살해되자,

고종 때인 1231년에 제1차 침입을 합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개경에까지 이르렀으나

화친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 정권의 최우는 몽골이 무리한

조공을 요고해 오자, 1232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대항을 하였습니다.

 

이에 몽골은 제2차 침입을 해 왔고,

이렇게 약40년 동안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무신 정권은 개경으로 환도하라는 몽골의 압력에

끝까지 버티며 강화도에서 대몽 항쟁을 지휘했으나

마침내 1258년 최의가 살해됨으로써 최씨 무신 정권이

끝나게 됩니다.

 

이후 1270년에 고려 조정은 몽골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배중손 지휘 아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몽골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 정권이 치안 유지를 위하여 창설한

야별초란 부대였습니다.

이들이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과 싸우다 포로로 잡힌 뒤 탈출한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까지 합쳐져 삼별초가 된 것 입니다.

 

 

삼별초는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대몽 항쟁을 펼쳤으나

여몽 연합군과 일전을 벌이다 배중손이 전사하고

패하고 맙니다.

 

진도 함락 후에는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의 지휘로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결국 1273년에 패하여 삼별초의

난은 진압이 됩니다.

 

 

 

* 국호를 "원"으로 정한 몽골은 이후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화주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로 100년간이나 철령 이북의 당을 점령하였다.

 

* 원은 고려의 군사를 징발해 연합군으로 2차례 일본 원정을

시도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했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 ( 테무친)

역사상식 (용어)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 ( 테무친)

 

 

 

 

 

거란과 여진족에 복속되어 있던 초원의 유목 민족인

몽골의 부족들은 금나라가 쇠퇴하자 세력을

키우더니, 1204년 테무친에 의하여 전 부족이

통일되었습니다.

 

이어 1206년 테무친은 부족장 회의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고

씨족 공동체 사회였던 몽골을 군사 조직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가 체제로 바꾸어 몽골 제국을 세웠습니다.

 

 

 

칭기즈 칸은 기마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정비한 뒤

원정의 길을 떠났습니다.

먼저 서하를 점령하고 ,1215년엔 금나라로 쳐들어가

베이징을 함락시켰습니다.

또한 서쪽으로 진출하여 이슬람 왕국으로 동서 교통로의

중심지였던 호라즘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다 1227년 배신한 서하 정복길에 다시 올랐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은 금나라, 페르시아,

남러시아,헝가리,폴란드 등을 점령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하편 칭기즈 칸은 죽기 전에 넓은 몽골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네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4한국(킵차크한국. 오고타이한국. 일한국. 차가타이한국)입니다.

 

이후 1271년에 칭기즈 칸의 손자로 몽골 제국5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 (세조)은 수도를 대보(베이징)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정한 뒤 완전히 중국을 지배했습니다.

 

 

 

* 칭기스는 절대적인 힘, 칸은 군주로 칭기즈 칸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이다.

 

 

* 칭기즈 칸의 세계 정복은 뛰어난 전술과 더불어 몽골군이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서로 교회 분열 ( 시스마 )

역사상식 (용어)

동서로 교회 분열 ( 시스마 )

 

 

 

 

12.13세기경부터 중세의 유럽은 크리스트교가

정치, 문화, 전신 세계 등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교회 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로마 중심의

서방 교회와 비잔틴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 교회로 나뉘어 성장을 합니다.

 

그러다 로마 교회가 게르만족에게 포교하기 위해

성상 숭배를 허용하자,

726년에 비잔틴 황제 레오3세는 성상 숭배를

금지하여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정치. 지리. 문화의 차이 외에도 현실을 중시하는

제도 중심의 서방 교회와 사상과 학문을 중시하는

교리 중심의 동방 교회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교회 개혁을 주도하던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교황의 권한을 강조하자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서방 교회를 폐쇄했고, 이에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에 파문장을 전달함으로써

교회는 분열하고 맙니다.

 

즉 , 이때인 1054년부터 크리스트교회는 서쪽은 로마

가톨릭교회,동쪽은 그리스정 교회로 분열되어

새로 출발하게 됩니다.

 

 

 

* 교회의 분열은 종교 용어로 " 시스마 "라고

하는데, 교리의 분리를 뜻하는 말이다.

 

 

*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바티칸 교황청의 지휘를 받는 교회로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회하고 불린다.

 

 

 

 

 

 

일본의 막부 정치 란

역사상식 (용어)

일본의 막부 정치 란

 

 

 

 

" 막부 정치 " 란

 

일본에서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

수장인 쇼군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가졌던 정치를 말합니다.

 

 

 

 

막부는 원래 "출정 나간 군의 지휘관이 임시로 머물던 천막"을

뜻하지만 , 여기서는 무사 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정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력으로

전국을 지배하게 되자 가마쿠라 지방에 최초로

막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어 가마쿠라 막부는 전국의 무사 계급을 주종 관계로

조직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 번째 막부는 1338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근거지로 수립한 무로막치 막부 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마지막으로는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권을 장악하고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무신 시대인 막부 정치는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까지

7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 무사 정권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예로부터

문(文)보다 (武)를 중시하였던 분위기 때문 입니다.

 

 

 

* 막부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실시하고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을 통제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 오랜 세월 유지되던 일본의 막부 정치는 1867년

메이지 천황 때 왕정 부활로 끝났다.

 

 

 

 

 

 

프랑크 왕국 분열 분할 베르됭 조약

역사상식 (용어)

프랑크 왕국 분열 분할 베르됭 조약

 

 

 

 

게르만족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

서유럽 일대에 여러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중에서 프랑크족의 클로비스가 481년에 갈리아 지방에

세운 크랑크 왕국은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뒤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으며 게르만 통일 국가로 발전합니다.

 

 

 

 

800년에는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가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여 서유럽을 통일하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뒤를 이은 루트비히 1세(루이1세)

사후 내분으로 프랑크 왕국은 분열 됩니다.

 

 

 

 

 

 

생전에 루트비히 1세는 세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했는데

그가 죽고 이들이 싸우자 놀란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내란 종경을 위하여 중재에 나섰습니다.

결국 세 아들은 843년,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기로

베르됭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중프랑크,서프랑크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다 중프랑크의 로타르2세가 죽자,

870년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메르센 조약을 맺고

중프랑크를 분할하여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렇게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중프랑크,서프랑크로

분열되어 오늘날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 카롤루스 대제가 통일 국가를 이룩하고

교육과 문예 진흥에 힘쓴 결과로 로마 문화와 크리스트교,

게르만 전통을 융합한 새로운 서유럽 문화권이

탄생하게 됩니다.

 

 

*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를 연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을

토벌한 뒤 라벤나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했는데,

이것이 로마 교황령의 시초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

역사상식 (용어)

노르만의 영국 정복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후 영국에는 서게르만의

앵글인과 색슨인들이 이주하여

앵글로,색슨 7황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후 영국은 7왕국 중 웨섹스가데인족을 쫓아내고

잉글랜드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러다 1066년 , 잉글랜드 왕인 에드워드가 아들이 없이 죽자

처남인 해럴드2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公) 윌리엄은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며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침입했습니다.

결국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전사시키고 항복을 받아내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윌리엄1세로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열었으며

정복을 통하여 왕위를 얻었다는 의미로 "정복왕"이라고도 합니다.

 

즉 영국은 노르망디 공 윌리엄의 정복으로 노르만의

왕조가 시작됐고, 지배 계급이 앵글로색슨 귀족에서

노라만 가(家)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후 윌리엄 1세는 몇 차례의 반란을 진압하여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실시하여

영국 성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1086년에는 징세를 목적으로 전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자.

농민의 수. 방앗간 .양어장 등 문와 시설까지

상세히 기록한 일종의 토지 대장인 "둠즈데이북"을

작성했습니다.

 

 

 

* 노르망디 공국은 북게르만 노르만족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세운 작은 나라이다.

 

* 노르만의 정복으로 영국은 약 300년 동안 프랑스어가

사용되면서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되었다.

 

 

 

 

 

 

소설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장편 소설

역사상식 (용어)

소설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장편 소설

 

 

 

 

 

돈키호테는 에스파냐의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지은

장편 소설로서 제1부는 1605년에, 제2부는 1615년에 펴냈습니다.

 

 

소설 돈케호테는 기사도 이야기를 읽다가 정신이 이상해져

스스로 중세 기사로 자처하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인 산초 판사가 나옵니다.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겪는 갖가지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통하여

이상과 현실과의 충돌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소설 입니다.

 

 

 

 

프랑스의 비평가 티보데는 이 소설을 "인류의 책"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인간을 그린 최초의 소설이며,최고의 소설"이라고

격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인물형을 평가할 때 " 돈키호테형 " 이란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정의감에 이끌려

이상을 향해 분별없이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성격의

인물형을 말합니다.

 

반대로 사색적이며 회의적인 경향이 강하고

결간과 실행력이 약한 성격의 인물형은 "햄릿형"

이라고 합니다.

 

 

 

 

 

 

마지노선 뜻 유래 마지막 한계선

역사상식 (용어)

마지노선 뜻 유래 마지막 한계선

 

 

 

 

마지노선은 당시 이것을 제안한 프랑스 육국 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생긴 말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에게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히틀러가 또다시 전쟁 준비를 하자 독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두 나라 국격에 750km에 이르는

장벽을 세웠습니다.

 

프랑스는 마지노선 공사에 약200억 프랑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였습니다.

공사도 1927년에 시작해 10년 뒤인 1936년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탱크도 부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는

마지노선은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의

기습과 공군의 공격으로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비록 마지노선은 쉽게 무너졌지만

"마지노선" 이란말은 아직까지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보통 허용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 최후 방어선을

마지노선 이라고 합니다.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역사상식 (용어)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 설치

 

 

 

 

 

9세기 초에 신라의 완도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로 건너가 장사를 하다 무령군 소장까지 오릅니다.

이때 중국 해적들에게 잡혀 와 노비를 팔리는 신라인들의

모습을 보고 분개한 장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과 해외 중계 무역의

중요성을 알리며 군사를 요청합니다.

 

이에 흥덕왕은 군사 1만 명을 내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했습니다.

 

 

이리하여 장보고는 828년에 해군 기지이자 해상 무역 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이 지역은 중국과 일본의 해로에 닿아 있는 중요한

해상 요충지이자 무역로였지만, 당시에는 해적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장보고는 먼 저 성을 쌓고 항만 시설을 보수한 뒤

군사를 훈련시켜 우리나라 근해에서

노략질하던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했습니다.

 

그리고 황해와 남해의 해상 교통을 지배하여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습니다.

 

 

이후 커다란 정치 세력을 형성한 장보고는

김우징과 함께 발란을 일으켜 성공했고

김우징이 즉위하니 45대 신무왕 입니다.

하지만 장보고는 846년, 그의 세력 확장에

불안해하던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게 살해됩니다.

 

 

 

* 청해진을 건설한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한 후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이를 토대로 당과 신라,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을 주도했다.

 

*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폐쇄되고 주민들은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이주 되었다.

 

 

 

 

 

 

마호메트 ( 무하마드 )의 이슬람교

역사상식 (용어)

마호메트 ( 무하마드 )의 이슬람교

 

 

 

 

마호메트 (무하마드)는 어릴 때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랍니다.

성장하자 대상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우고

크리스트교와 유대교를 접하게 됩니다.

 

25살 무렵에는 큰 부자로 미망인이었던

하디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종교와 신에 관심이 많았던 마호메트는 세속적인

행복보다 인생의 참뜻을 찾기 위하여 단식과

명상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러던610년.40세의 마호메트는 메카 교외의

히라 산 동굴에서 알라 신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알라의 예언자로 다신교와 우상 숭배를

부정하고 알라 신 앞에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메카의 지배층인

귀족과 상인들은 전통적인 다신교를 부정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마호메트에게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622년,마호메트와 신도들은 메디나로 쫓겨났습니다.

이를 "헤지라(성스러운 옮김) 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림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메디나에서 포교에 성공한 마호메트는 군대를

양성하여 630년에는 메카를 정복합니다.

그리고 곧 전 아라비아가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 (코란)은 알라 신의 계시를 수록한 이슬람교의 경전이다.

 

 

* 이슬람교는 크리스트교,불교아 함께 세계 3대 종교이다.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인 무슬림은 중동지역,터키,

카피스탄 등 13억여 명이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요동정벌 (역사상식)

역사상식 (용어)

고구려 광개토대왕 요동정벌

 

 

 

광개토 대왕은 우리 민족 역사상 국가의 영토 확장에

가장 큰 활약을 펼친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한 임금입니다.

 

 

391년에 17세의 태자 담덕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고구려 19대 임금 광개토 대왕 입니다.

왕위에 오른 광개토 대왕은 먼저 "영락"이라는

연호(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칭호)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해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즉위 이듬해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 등 10개의 성을 빼앗고, 이어 요새인 관미성까지

함락시켰습니다.

 

396년에는 한강 너머까지 진격하여 58개 성을 차지하고

백제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 왔습니다.

 

또한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에 원군을 보내어 격퇴시겼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거란과

숙신을 정벌한 뒤, 402년에는 후연을 공격해 빼앗겼던

신성과 남소성을 되찾고 요동성을 차지했습니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북으로는 요동 방면을

포함하여 만주 지역까지 ,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 장수왕은 414년에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ㅡ 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과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치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 대왕비는 현재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퉁거우에 있다.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

역사상식 (용어)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

 

 

 

"군인 황제 시대"란

로마에서 군대가 멋대로 황제를 내쫓고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서로 싸우던 시대를 말합니다.

 

즉 군사 쿠데타가 쉴 새 없이 일어났던 50년간을 말합니다.

 

 

 

군인 황제 시대는 서기 235년 , 최초의 사병 출신 군인으로

황제에 오른 막시미누스 때부터입니다.

원래 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전 황재의 추천이나

원로원의 지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을 무시하다 폐위되어

부하들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이후 황제 자리는 군대에 의해 마음대로 빼앗고 빼앗기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수 명을 다한 황제는 불과 2명 분이었고,

공동 황제와 승인을 받지 못한 황제까지 따지면

50년 동안 무려 26명이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사람은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 입니다.

284년 황제에 오른 그는 군제.세재.화폐 제도를

개혁하고 통치권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군인 황제 시대를 끝맺었습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황제로

함께 로마를 분할해 4분 통치했다.

 

*군인 황제 시대 동안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침략,

군비 증가로 인항 재정 궁핍, 중산층의 몰락 등으로

로마는 쇠퇴하였다.

 

 

 

 

 

 

우리나라에 온 부처님 불교의 유래

역사상식 (용어)

우리나라에 온 부처님 불교의 유래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입니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의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최초로 공인 되었습니다.

 

소소림왕은 순도에게 성문사 (초문사)를 지어 주었고

고국 양왕은 불교를 권장하였으며, 광개토 대왕은

평향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백제는 387년 침류왕 때 동진에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오면서 불교가 공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552년 성왕은 불상과 불경을 노리사치계를

통하여 일본에 보내 불교를 최초로 전파했고,

법왕은 살생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나랍니다.

5세기에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해졌으나

널리 퍼지지 못하였습니다.

법흥왕 때인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오면서 정식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전파되지 못하다

527년에 이차돈이 순교한 후 비로서 공인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도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전달하여 문화 발달에 공헌하였고

중앙 집권화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 삼국 시대의 불교는 토작 신앙을 포섭하면서

보급되었기 때문에 샤머니즘적인 성격이 강했다.

 

 

* 삼국 시대 때 왕실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서고 장려했다.

 

 

 

 

 

 

진시황제 그리고 분서갱유

역사상식 (용어)

진시황제 그리고 분서갱유

 

 

 

 

기원전 221년 , 진(秦) 왕 정이 천하를 제패해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우면서 전국 시대는 끝이 납니다.

 

이후 정은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에 힘썼습니다.

또한 시황제는 군현제 실지,화폐,문자,도량형의 통일,

전국적적인 도로망 건설,만리장성과 아방궁의

축조 등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대토목 공사화 정치적 비판을 막으려고

학문과 사상을 통제하여 백성들과 학자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기원전 213년, 시황제는 이사의 건의를 받아

의약,점복,농업에 관련된 책과 진의 역사 기록과

왕실 서적을 제외한 나라 안의 모은 책을 30일 이내에

태워 없애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분서 (焚書) 입니다,

그 이듬해엔 이에 반항하는 학자들을 사형시키고

수백명을 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한 끔찍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 입니다.

 

즉 분서갱유 란,

진의 시황제가 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생매장한 일을 말합니다.

 

이렇게 강력한 정책을 펼치던 시황제가 죽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기원전 206년에

진 제국은 멸망 하고 말았습니다.

 

 

 

* 분서갱유로 인하여 중국 내의 유학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무제 때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 크게 발전한다.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례의 전쟁

역사상식 (용어)

포에니 전쟁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례의 전쟁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3세기에 중반쯤 시작해

120년 동안 지중해의 제해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합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을

하고자 하였고, 시칠리아를 둘러 싸고 카르타고와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였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264년에 시작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이나게 됩니다.

 

로마는 경제력과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강하게 결속된 시민군이 용병과 피정복민으로 편성된

카르타고군보다 강했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복수전으로

기원전 218년에 일어났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각지의 로마군을 물리치고 ,

칸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어 승리를 눈에에 두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가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자 한니발은 철군했고

이어 북아프리카의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패해 제2차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를 로마에 넘기고 배상금까지

지불했으며 한니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제3차 포에니 전쟁을 벌여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전 시가를 불태웠으며

주민들은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지중해에 거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고,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 포에니"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키는

말로ㅡ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카르타고 사람들도 포에니라고 불렀다.

 

 

 

 

 

크리스트교의 공인 밀라노 칙령 이란

역사상식 (용어)

크리스트교의 공인 밀라노 칙령 이란

 

 

 

 

바울로 (바울)에 의해 예술의 가르침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 크리스트교는 전파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배층에 의해 탄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리스트교도들을 가두거나 죽여 3세기부터는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박해는 주로 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화형,십자가형,참수형,맹수와의 격투,광산노동 등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상류층까지 널리

전파되자 313년 , 로마를 공동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리키니우스 황제와 밀리노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회의 끝에 크리스트교를 공인한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밀라노 칙령 이후 크리스트교 신앙의 자유는 물론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도 모두 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리키니우스가 크리스트교도들을

다시 작해하자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리키니우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합니다.

그리고 성직자의 공역을 면제해 주고, 민사 소송 재판권과

노예 해방의 권리 등을 주었습니다.

 

 

 

 

*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크리스트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파를 이단으로 쫓자내고 예수의 신성을 내세운

아타나시오스의 삼위 일체설을 정통으로 삼았다.

 

 

 

 

 

 

 

걸프 전쟁 이아크의 쿠웨이트 침공 다국적군과의 전쟁

역사상식 (용어)

걸프 전쟁 이아크의 쿠웨이트 침공 다국적군과의 전쟁

 

 

 

 

1990년 8월, 이라크군은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라크 대통령 사람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원유를

훔쳐 갔고, 원유를 과잉 공급하여 유가를 떨어뜨려

이라크 경제를 파탄으로 내몰았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후세인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최대 산유국의 하나인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서방 국가들과

함께 유엔에서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철군하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을 승인하기로 합니다.

 

 

그러자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고 1991년 1월17일,

미국은 영국.프랑스.독일 등 33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즉, 걸프 전쟁 이란

이라크의 쿠웨이트 불법 점렴에 맞서 유엔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와 벌인 전쟁을 말합니다.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동원하여 초반부터 기세를 장악했습니다.

 

결국 이라크는 다국적군의 무차별 공습과 지상군의

공격에 견디다 못해 전쟁 시작 40여 일만인

2월28일에 항복을 했습니다.

 

 

 

* 걸프전 당시 미군은 인체에 유해한 방사능 먼지를

내뿜는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 쿠웨이트가 196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국경 분쟁이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