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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중국의 혁명을 이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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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중국의 혁명을 이끈

 

 

 

 

마오쩌둥 (1893~1976)은 중국의 정치가이자

공산주의 이론가 입니다.

 

 

중국 후난 성의 샹탄 현 사오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18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 학생 단체들과 만나면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에 기울였습니다.

 

 

1922년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1924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1934년에는 당의 지도권을 손에 쥐었으며

1945년 4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뽑혔습니다.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장제스와 화평 건국의

원칙에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기 힘들게 되자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 주석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습니다.

 

 

 

1959년 4월 마오쩌둥은 국가 주석에서 물러난 뒤

공산당 주석으로만 있었습니다.

1965년 10월 이후로는 공산당 내에서 혼자가

되어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을 지위하여

힘을 "마오쩌둥 사상"을 높이 내걸었습니다.

 

1970년 헌법 수정 초안을 마련하여 1인 체제를 굳히고

중국 최고 지도자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혼자가 된 채 죽음을 맞았습니다.

 

 

 

 

 

 

뤼미에르 형제 영화 산업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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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 영화 산업의 아버지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의 영화 촬영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명한 형제 입니다.

 

 

 

기계 제작자이며 제작,흥행,배급 등 오늘날의

영화 제작과 보급의 바탕을 앞서 만든 영화의 시조입니다.

 

형 오귀스트와 (1862~1954)

동생 루이 (1864~1948) 형제는 사진가의 아들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연구한 결과,

필름이 잘 움직이는 장치를 완성하여 촬영기와

영사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시네마토크라프 뤼미에르" 입니다.

 

 

 

 

1895년 2월,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

뤼미에르의 특허를 받았고

이 기계로 촬영한 영화를 일반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보여 주었습니다.

 

작품은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출구"

"열차 도착" "물고기를 낚는 아기"

"바다"등 각각 필름 길이 10여 미터 정도의 영화로

상영 시간은 1분도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영화의 바탕을 마련하였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가로서 능력과 예술가로서 재능이

부족했던 뤼미에르 형제는 실사 영화가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흥행이 벽에 부딪히자

2년 뒤 영화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컬러 사진과 입체 사진을 연구하는 데 바쳤습니다.

 

 

 

 

 

말띠 성격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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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띠 성격에 대해서

 

 

 

말띠 해에 태어난 사람은 발랄하고 인기가 있으며

재치가 있습니다.

용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성적 매력이 많습니다.

 

실속  있고 따뜻하게 흥미를 끌며 매우 지각있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의 변하기 쉬운 기질은 때때로 그를 불같은 성질과

성급함,고집스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말띠들은 쉽게 사랑에 빠지며

쉽게 식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말띠는 일찍 집을 떠납니다.

아니면 그의 독립정신이 그로 하여금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하고 직업을 갖도록 자극합니다.

 

모험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민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돈을 다루는 재주도 탁월합니다.

자신감과 생기가 있고 정력적이며 충동적이고,

가끔 경솔하기까지 한 말띠는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밝은 색상과 색다른 치레를 좋아하며

지나치게 화려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말띠성격 중에는 정신적,육체적인 훈련을 좋아합니다.

민첩하고 우아한 몸놀림과 활발한 반사작용 그리고 재빠른 말솜씨

등으로 우리는 말띠를 구분하곤 합니다.

그는 재빨리 대답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의 마음을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움직여

비록 안정성과 인래력이 부족하더라도 개방적인 마음

자세와 유연한 태도로 그것을 보충합니다.

기본적으로 말띠 성격은 잘 순응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말띠 성격은 종종 열두 띠 중에서 바람기 많은 남자와

여자이며 허세부리기를 좋아하고 움직임이 있는 곳을 좋아합니다.

틀림없이 유쾌한 사람으로서 칭찬 해주기를 좋아합니다.

 

 

 

- 내궁합.사주 .팔자 중에서 -

 

 

 

 

 

최초의 영자 신문 의종 우강 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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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영자 신문 의종 우강 양기탁

 

 

 

 

양기탁 (1871~1938) 최초의 영자 신문을 발행한 한말의

언론인이자 독립 운동가 입니다.

 

 

어릴 적 이름은 의종이며, 호는 우강으로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 게일의 한영자선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e.t 베셀과 국한문혼용체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답니다.

 

디름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별도로 발행하였습니다.

 

1907년 안창호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 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또 오동진,김성삼 등과 통의부를 창설하고

1925년 이청천,김동삼 등과 정의부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을 썼습니다.

 

이때 화흥중학교,화성의숙,동명의숙을 세워

혁명간부 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를 발행하여 만주에 있는

한국인 계몽에 힘을 썼습니다.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뽑혔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일하였습니다.

1398년 장쑤성에서 병사하였고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서포 문효 김만중 구운몽 한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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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문효 김만중 구운몽 한글 소설

 

 

 

 

김만중 (1637~1692)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 입니다.

 

호는 서포, 시호는 문효 입니다.

1665년 (현종 6년) 문과에 장원을 하였고

1671년에 암행어사가 되어 우리나라 남부 지역을

조사하여 백성의 어려움을 살폈습니다.

 

이듬해 동부승지 (조선시대 6승지의 하나)가 되었으나

1674년 서인의 모략으로 관직을 빼앗겼습니다.

 

 

그 뒤 1679년 (숙종5년)에 예조 참의 (예조의 정3품직), 1683년에

공조 판서 (공조의 장관)를 지냈고 이어서 대사헌 (관리를 감찰하여

기강을 진작하는 업무를 맡았던 사헌부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1685년에 홍문관 대제학 (홍문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있었으며

1686년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선천에 유배되었습니다.

1688년 돌아왔지만 이듬해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김만중은 그곳에서 대표작인 "구운몽"을 쓴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한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쓴 한글 소설로 우리나라 소설 연구의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구운몽 이외에 "사씨남정기", "서포만필"등이 있습니다.

 

 

제봉 고경명 금산의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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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 금산의 의병장

 

 

 

 

 

제봉 고경명은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습니다.

1522년 (명종7년)에 진사에 올랐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제봉집), (유서석록) 등의 책을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임억령,김성원,정철 등과 학문과 나랏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뒷날 사람들은 네 사람을 가리켜

"식영정 사선(전남 당양군 남면에 있는 식영정이라는 정자에서

노니는 네 명의 신선)"이라 불렸습니다.

이어서 사신의 기록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000명을 이끌고 두 아들 종후,인후와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금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효종 때 금산 군수 여필관이 고경명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에 글을 쓰고 순절비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 경찰이 깨뜨려 헐어 버렸습니다.

 

해방 뒤에 후손들이 다시 비석과 비각을 세웠고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로알 아문센 최초로 남극에 도달한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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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 아문센 최초로 남극에 도달한 탐험가

 

 

 

최로 남극점에 도달한 탐험가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보르예에서 선원의아들로

태어났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북극 탐험을 꿈꾸었답니다.

크리스티아니아 지금의 오슬로에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답니다.

그렇지만 1895년 일등 항해사가 된

아문센은 1897년부터 1899년까지 벨기에의

남극 탐험대에 참가하기도 했답니다.

 

 

1903년부터는 작은 배 이외아호를 타고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에 세계 처음으로 성공했답니다.

이 항해에서 북자극의 위치를 확인했답니다.

 

1909년 미국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로 남극 탐험을

떠났답니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세우고, 개 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불과55일만인 1911년 12월14일

인류사상 처음으로 남극점에

도달하는데 아문센이 성공하였답니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 탐험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려고 비행정으로

포롬세 기지에서 떠났답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조난을 당해

그곳에서 숨졌답니다.

아문센의 남극 탐험에 쓰인 이외아 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금문 공원에

보존되어 있답니다.

 

 

 

 

임경업 장군 이괄의 난 진압한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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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 이괄의 난 진압한 명장

 

 

 

조선중기의 명장인 임경업은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이었답니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1618년 광해군 10년

무과에 합격하였답니다.

 

그뒤로 1624년 정충신 밑에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업적을 세웠답니다.

그때 병자호란이 또다시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요청하였답니다.

 

 

그렇지만 김자점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임경업은 수군장으로 참전하였고,

이사실을 명나라에 알려 피해를 줄였답니다.

 

1640년 안주 목사때 청나라의 요청에따라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였답니다.

임경업은 이를 명에게 알리려다가

발각되어 붙잡혔지만 금교역에서

탈출하였답니다.

 

 

임경업 장군은 1643년 명나라에 망명하고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로 붙잡혔답니다.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고문받다가 목숨을 잃었답니다.

1697년 숙종 23년 관직을 되찾았고

충주 충렬사 등 임경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답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에 있는

비각은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47호랍니다.

 

 

 

 

 

톨스토이 세계적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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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세계적인 소설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출생했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 비평가이자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인물로 꼽혔답니다.

 

 

1851년 군대에서 첫 작품인

유년시절을 써서 네크라소프에게 큰

극찬을 받았답니다.

 

1862년부터 문학에 전념하고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였답니다.

그뒤로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였답니다.

 

 

그렇지만 그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으로

종교에 의지하기 시작하였답니다.

 

이때 톨스토이가 작품의 주제를 바꾸는 시기였는데

고백 등을 통해 종교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나갔답니다.

 

 

이렇게 바뀐 뒤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불렀답니다.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전담

의사를 데리고 집을 나와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답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도중에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 현재 톨스토이 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었답니다.

 

 

 

마크 트웨인 미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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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미국 소설가

 

 

 

 

미국 자유혼을 쓴 소설가 마크트웨인의

본명은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 랍니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57년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이 되었답니다.

 

필명인 마크 트웨인은 강의 뱃사람이

쓰는 말로 안전 수역을 나타내는

12피트를 뜻한답니다.

 

 

남북 전쟁이 터져 수로 안내인 일자리를 잃고

남군에 들어갔지만 2주일만에

빠져나아서 광산 기사와 신문기자로

일했답니다.

 

마크 트웨인은 캘리베러스의 명물 도약 개구리

라는 제목의 글을 1865년 11월 뉴욕잡지인

새터데이 프레스에 발표했는데 야성적이며

대범한 유머로 큰 인기를 얻었답니다.

 

 

 

또한 유럽과 성지를 도는 여행단에 참가하여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였다가 돌아온 뒤에

다시 정리하여 철부지의 해외 여행기를

출판하였답니다.

 

그 후로 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생활

등의 걸작을 썼답니다.

그 중에서도 1884년에 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변두리에 사는 자유인의 혼을 노래한 걸작으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랍니다.

 

 

마크 트웨인의 주요작품으로는 이외에도

에드워드 4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왕자와 거지 등이 있답니다.

 

 

김옥균 삼일천하로 개혁에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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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삼일천하로 개혁에 실패

 

 

 

 

조선후기 정치가 김옥균은

호는 고균 또는 고우였으며, 시호는 충달

이라고 불렸답니다.

6살때 당숙인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1872년 고종 9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하였다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위해 힘썼으며, 특히

1881년 과 1882년에 일본을 다녀 온 후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 제도를

개혁하기로 다짐하였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한규직 등을 내쫓고

정권을 잡았답니다. 그렇지만

청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의 요청으로

위안스카이가 군사를 끌고

쳐들어오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피하고 말았답니다.

 

김옥균이 정권을 잡은 것은 단3일뿐이었기 때문에

삼일천하 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답니다.

10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중에게

살해 되었답니다.

 

 

 

1895년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풀려났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의 벼슬이 내려졌답니다.

 

김옥균이 지은 책으로는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 등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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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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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실학

 

 

 

조선후기 학자인 정약용은 호는 다산,삼미,

사암, 자하도인, 탁옹 등으로 불렸답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783년 회시에 합격하고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가르쳤답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큰 활약을 했으며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도 힘썼답니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때 체포되어 장기에

유배되었고, 그후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당했답니다.

 

그곳 다산 기슭에서 18년간 학문에 몰두하고

정치와 행정의 개혁, 경제의 분배

노비제의 폐기등을 주장하였답니다.

 

 

 

 

정약용의 학문은 유형원과 이익을

계승하였고,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 도입론을 받아들이며

실학을 집대성 하였답니다.

 

어렸을때부터 시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답니다.

또한 역사와 지리 등에도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하기도 하였답니다.

 

 

 

 

정약용이 지은 책으로는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이

실려있답니다.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의 묘소에 비가 세워져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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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한말의 독립운동가

인물상식

박은식 한말의 독립운동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겸 대통령 대리였던

박은식은 열살무렵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답니다.

신기영, 정약용 등의 문인과도 만나면서

실학사상을 배우기 시작하였답니다.

 

또한 26살때 박문일, 박문오 형제에게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답니다.

1898년 9월 황성신문의 주필을 맡았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답니다.

 

 

1909년 유교 구신론을 발표하였고,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세워 종교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맞서 싸웠답니다.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 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만들었답니다.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의 자식들을 가르쳤답니다.

 

 

1915년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고,

3.1운동 뒤 임시정부가 세워졌답니다.

그때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답니다.

 

1924년 임정 국무 총리 겸 대통령 대리를

맡았답니다. 1925년 3월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박은식은 헌법을 개정하였고, 대통령제를

국무위웑로 고친 뒤,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그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답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까지 수여 받았답니다.

 

 

 

춘사 나운규 아리랑

인물상식

춘사 나운규 아리랑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춘사랍니다.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였으며

항일 독립투사로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조국과 영화에

바쳤답니다.

 

회령의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중국 간도의 명동 중학을 다니던 중에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러시아

백군을 거쳐 1920년 홍범도가

지도하는 독립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답니다.

 

 

 

 

 

1923년 신극당 예림회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에서 공연을 하였답니다.

그다음해인 1924년 부산의 조선 키네마에 들어가

운영전에 출연하였고, 그때 맺은 영화의

인연으로 1926년엔 아리랑의 감독 및

주연으로 활동했답니다.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1929년엔 한국 최초의 문예 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이를 제작했답니다.

 

 

1936년 이후에도 임자없는 나룻배 등 여러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거나 감독 하였답니다.

특히 1936년 아리랑 제3편을 제작 하면서

녹음 장치에 성공하여 한국의

유성 영화 시대를 열었답니다.

 

특히 항일 영화를 만들어 민족의 혼을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건국 훈장을 받았답니다.

 

 

 

 

최용신 농촌 계몽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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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농촌 계몽 운동가

 

 

한말의 농촌운동가였던 최용신은

원산에서 태어났답니다.

1919년 두남학교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접하였답니다.

17살때 교회 청년회 회장인 김학준과 약혼했답니다.

 

서울 협성신학교 지금의 감신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황에스더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답니다.

1학년 때인 1929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농촌 실습을 나갔다가

농촌 계몽에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답니다.

 

 

 

최용신은 1931년 경기 화성군 샘골에 파견되어

농촌 교육을 시작하였답니다.

마을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공부방을 짓고

날마다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니며

어린이들을 가르쳤답니다.

 

1934년 일본 고배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병에 걸려 돌아왔답니다.

그 뒤로 농촌 계몽 운동을 계속하던 중

목숨을 잃고 말았답니다.

 

 

최용신의 이야기는 1935년 소설가 심훈에 의해

상록수 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연재 되었답니다.

그뒤로 영화로도 만들어 졌답니다.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 봉사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해 오고 있답니다.

 

 

 

 

최영 장군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인물상식

최영 장군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고려 시대의 명장 최영 (1316~1388)

 

최영 장군의 시호는 무민이며 1352년 (공민왕 1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고 호군에 올랐답니다.

 

1354년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장사성의

난군을 토벌하고 귀국 하여 서북면 병마부사가

되어 원나라에 속해있었던 압록강 서쪽의 땅을

되찾았답니다.

 

 

 

 

 

최영장군은 13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400여척을

격파 하였으며 1360년에는 서경(현재의 평양)에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치가도 하였답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였답니다.

 

 

1363년에 최영장군은 흥왕사의 변을 진압하여

1등 공신이 되고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쳐들어오자

의주에서 섬멸하였답니다.

 

 

 

 

최영은 1365년 강화에서 왜구와 싸우던중에

신돈의 모함으로 유배되었다가

1371년 복직되어 문하찬성사를 지냈습니다.

1376년 삼남 지방을 휩쓸던 왜구를

무찌르기도 하였답니다.

 

 

최영은 1381년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정벌군을 이끌고 나갔지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패하였답니다.

 

 

이성계가 개성에 들어오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붙잡혀 고봉 (현재 고양)등지에

유배 되었다가 개경에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현재 최영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식

덕양구 대자동에 있으며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노벨평화상

인물상식

알버트 슈바이처 노벨평화상

 

 

 

아프리카 밀림에서 인술을 베푼 성자인

알버트 슈바이처는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알자스가 프랑스령이 되어

프랑스 국적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과 죽음을 많이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해

1913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즉 지금의 가봉 공화국으로 넘어가

오고우에 강변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스스로 차렸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인이라하여 슈바이처는 포로의 몸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고 병원도 폐쇄 되었답니다.

그 뒤로 아프리카 생활기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출판하여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답니다.

 

다시 랑바레네로 돌아간 슈바이처는

병원을 다시 열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진료와 전도를 하였답니다.

 

 슈바이처는 많은 일들을 하면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답니다.

슈바이처는 그상금으로 다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나환자촌을 세웠답니다.

1960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가

가봉 공화국으로 독립한 후

원주민들은 새로 창설된 적도 성십자 훈장으로

슈바이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답니다.

 

 

슈바이처는 이처럼 많은사람들을 도와줄 뿐 아니라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개신교 신학자 이자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 였고 오르간 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이랍니다.

 

 

 

루이스 파스퇴르 (프랑스의 화학자)

인물상식

루이스 파스퇴르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스 파스퇴르 (1822~1895)는 미생물학의 창시자 입니다.

 

파스퇴르는 프아스 동부의 돌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에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모교의 조수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1848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화학 교수가

되었으며 화학조성, 결정구조,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입체 화학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랍니다.

 

 

 

 

 

파스퇴르는 이후 발효와 부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뒤 젖산 발효는 젖산균,

알콜 발효는 효모균의 생활에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발견하였답니다.

 

 

이어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답니다

또 포도주가산화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저온 살균법을

생각해 내 프랑스의 포도주 제조에 크게

이바지 하였답니다.

 

 

 

 

 한편 파스퇴르는 부패가 공기중의 미생물

때문에 일어나는 것을 실험적으로 확인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백신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의 일반화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1881년 루이스 파스퇴르는 푸이 르포르에서의 야외

실험으로 가축에 탄저병 백신을 놓아 그 효과를 증명하였답니다.

 

1881년 프랑스 학사회 회원, 1886년 파스퇴르 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이하기도 하였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산균의 아버지가 이분이 맞는것 같네요 ~

최무선 (우리나라 최초 화약을 만든 발명가)

인물상식

최무선 (우리나라 최초 화약을 만든 발명가)

 

 

 

 

얼마전 티비에서 영화 신기전을 보았습니다.

내용에는 신기전을 만들어 오랑케들을 무찌르는

내용이 있었는데요.

 

영화를 보다 문득 화약을 만든 사람이 누구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배운 최무선 이라는 이름이 쉽사리

떠올르지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이번 시간에는 최무선에 대한

간단히 알아보고자 하여 글을 올립니다.

 

 

 

 

최무선 (?~1395) 고려말,조선 초의 발명가 입니다.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으로 제작을 하여

사용을 하였답니다.

 

최무선은 무관으로서 고려 말기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화약과 총을 만들기 결심하였답니다.

 

 

 

최무선은 이미 화약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왕래가 많은 무역항 벽란도에서

염초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강남 지방에서 온 이원을

만나 제조법을 배웠답니다.

 

 

 

 

 

1377년 (우와3년) 화통도감을 설치하도록 하여 화약을

만들었답니다.

또한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 석포, 화포, 신포, 화동,

화전, 철령전, 등 각종 화기를 만들었으며

전함의 건조에도 힘을 썼답니다.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했을 때

최무선은 부원수로서 진포에서 화포와 화통등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켜

영성군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1383년 남해 관음포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고

1389년에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집에서

"호약수련법"    "화포법"등을 책으로 써 냈다니다.

 

 

 

최무선은 조선의 군사력을 한층 높이 업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중 하나입니다.

 

 

 

베트남전쟁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인물상식

베트남전쟁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베트남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호치민이 공산당 정권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웠답니다.

 

 

이에 프랑스가 탄압하여 베트남국을 수립하자

호치민이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움으로써 베트남은 둘로 나위어져 전쟁을 벌였답니다.

 

 

그러다 1954년에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휴전을

하여 남쪽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북쪽엔 공산당 정권인 북베트남이 자리를 잡고 대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1960년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한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들고 일어나 베트남은 공산화의 위기를 맞게 된답니다.

 

 

이에 미국은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참전을 하게 된답니다.

 

 

미국은 1961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하여 1965년 부터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미국의 요청으로 대한민국,타이,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뉴질랜드도 베트남전쟁에 참전을 하게 된답니다.

 

 

 

 

 

하지만 미군은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열대 기후로

고전을 하게 되며 승리도 하지 못하고

1973년 파리 협정에 따라 철수를 하게 된답니다.

 

 

결국 베트남은 1975년에 적화통일되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게 됩니다.

 

 

즉,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을 모두 말하는데

특히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이 참전하에

남북으로 갈라져 벌인 통일 전쟁을 말한답니다.

 

 

 

 

 

 

 

* 베트남이 공산화 된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가 되었답니다.

 

 

* 대한민국은 베트남전쟁에 1964년 부터 철수한 1973년까지

32만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을 하여 약 5000명이 전사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