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마라톤이 유래된 페르시아 전쟁 동서양의 싸움

역사상식 (용어)

마라톤이 유래된 페르시아 전쟁 동서양의 싸움

 

 

 

"페르시아 전쟁" 이란

페르시아가 자신의 영향권에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아테네를 공격한 전쟁 입니다.

 

 

 

 

기원전 492년 ,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 원정을

떠났으나 그만 폭풍을 만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300여 척의 함선과 1만의 군사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어 기원전 490년 , 다리우스1세는 제2차 원정을 떠나

아테네의 북동쪽 마라톤 평원에 상륙합니다.

이때 마라톤과 아테네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진을 친

아테네군은 뛰어난 전술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습니다.

 

이후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30만의 육해군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스파르타군을 물리친 페르시아에 유리했지만

유명한 살라마스 해전에서 아테네군에게 대패해

또 원정에 실패를 합니다.

 

이듬해 봄 페르시아는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나

플라타이아이 평원과 이오니아 해안의 미칼레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페르시아 전쟁은 결국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마라톤은 페르시아 전쟁 때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이 승리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 페르시아 전쟁은 오리엔트 전제 군주 국가의

침략에 대한 서방 자유 세계의 승리하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의 해체

역사상식 (용어)

고르바초프 소련의 해체

 

 

 

 

 

고프바초프는 개혁과 개정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해 나갔습니다.

 

1987년에는 미소 중거리 핵전력 폐기 조약에 서명하고,

198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 시켰습니다.

또한 1989년 12월에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몰타 회담을 갖고 냉전 체제의 종식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1990년에 대통령이 되자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신연방 조약을 준비하며

각 공화국도 독립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소련의 공산당 보수 강경파들은

1991년 8월 19일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옐친은 반쿠데타 시위를 주도하여 3일 만에

쿠데타를 진압하고, 공산당 활동을 정지시킨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어 옐친은 연방 정부의 유지보다는 러시아의 독립을

추진하여 12월에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선언했습니다.

 

 

 

이리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물러나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해체가 되어 15개의 독립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몰도바,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2개국은 정치 공동 체인

독립국가연합을 결성하였습니다.

 

 

 

* 소련의 해체와 더불러 1990~1992년 사이에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도 붕괴하였다.

 

 

* 소련 해체로 독립한 발트 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은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단군 왕검 고조선 건국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역사상식 (용어)

단군 왕검 고조선 건국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 왕검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

의하면 단군 왕검은 환웅(하늘나라 황제의 아들)과

웅녀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 뒤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을

건국 이념으로 삼아 도읍은평양성,

국호는 "조선"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어 단군 왕검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 (제사장,정치 지도자)의

칭호였ㅇ며,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이라 하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책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엔 "8조의 법(팔조금법)"이 있었는데,

그중 전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3.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주인의 노비가 됨이 원칙이나

돈으로도 배상할 수 있다.

 

 

 

한편 고조선은 단군 왕검 이후에

왕검성을 중심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과 준왕 같은

뛰어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고

중국의 연나라와 서로 세력을 다툴 만큼 강성하였습니다.

 

 

 

* 단군 건국 신화는 고려,조선,근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다.

 

 

 

 

 

 

 

 

 

농경과 목축을 시작한 신석기 혁명 이란

역사상식 (용어)

농경과 목축을 시작한 신석기 혁명 이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목축과 농경을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류가 자연을 개발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인데,

이를 근대의 산업 혁명 못지 않은 변화라고 하여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 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7000년경 ,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돼지나 염소를 가축으로

기르고 농사를 짓시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인류의 생활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먹을 것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며 수렵과 채취를

해야 했지만, 농사를 짓다 보니 한곳에 머물러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정착 사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식량의 확보로 생활이 안정화되자 인구도 크게 늘어나,

씨족 사회에서 부족 사회로 발전합니다.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고 문명이 발생하게 됩니다.

 

 

 

신석기 혁명 이전에는 식량을 똑같이 분배하는 평등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농사로 생산량이 늘어 가면서 남은 것을

특정 가족이 소유하게 되자, 빈부의격차와 사유 재산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식량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계층이 형성되어 기술자나 군인 ,관리,제사장

같은 직업이 생겨났습니다.

 

 

 

 

 

* 구석기 시대의 경제는 채집 경제, 신석기 시대의 경제는 생산경제 이다.

 

* 신석기 혁명의 특징은 돌을 갈아서 만든 석기와 농경이다.

 

 

 

 

 

 

 

 

 

 

 

권력형 비리 의혹 게이트 뜻 유래

역사상식 (용어)

권력형 비리 의혹 게이트 뜻 유래

워터게이트

 

 

 

게이트 란

문이란 뜻이지만

시사 용어로 쓸 때는 정부가 기타 정치 권력과 관련된

대형 비리 의혹 사건 또는 부패 스캔들을 말합니다.

 

 

이 말의 유래는 1972년 6월에 발생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입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의 닉슨이었습니다.

닉슨의 재선을 위하여 대통령 보좌관이 연계된 공작 팀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닉슨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게이트란 말을 시사

용어로 쓰게 되었습니다.

 

즉 게이트라는 용어는 바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후부터 정부나 정치 권력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대형 비리 의혹 사건이나 스캔들 또는

그러한 불법 행위 등을 말할 때 흔히

000 게이트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이후에 게이트라는 이름을 붙인

여러 비리의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프리마 돈나 뜻 제1의 여인

역사상식 (용어)

프리마 돈나 뜻 제1의 여인

 

 

 

 

프리마 돈나는 이탈리아어로

"제1의 여인" 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원래 18세기 오페라의 기본이 되는 배역의

명칭으로 제1 여성 가수나 주역을 맡은 여성

가수를 프리마 돈나 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주역 남성 가수는 프리모 우오모라 했고

제2의 여성 가수는 세콘다 돈나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에는 프리마돈나를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뽐내고 질투심 많으며 변덕스러운

오페라 주역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을

~의 프리마돈나"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오페라에서 프리마돈나는 가장 중요한

소프라노 가수이며, 프리모 우오모는

테너 가수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이슨 송재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한 유학파 지식인

역사상식 (용어)

제이슨 송재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한 유학파 지식인

 

 

 

 

 

서재필 (1864~1951) 한말의 독립 운동가

 

 

전라남도 보성 출생으로 호는 송재, 영어 이름은

제인슨 입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 김성근에게 한학을

배워 1879년 (고종16년) 문벌가의 자식 가운데

뛰어난 이를 뽑은 전강에서 장원을 하였습니다.

 

 

이듬해 졸업하고 돌아온 서재필은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하였답니다.

1889년 워싱턴 대학에서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

박위를 받았습니다.

 

 

1896년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고국으로 돌아와서 중추원 고문을 맡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재상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만들었습니다.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지만

보수파와 일부 외국인의 반발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문제를

세계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과 함께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1977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뜻

역사상식 (용어)

루비콘 강을 건너다 뜻

 

 

 

 

루비콘 강을 건넜다 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뜻으로

이미 결정이 끝나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역사적 배경에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등장합니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체제였는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지역에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커졌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홀로

로마로 갔다가는 죽을 게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일화로 인해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출세의 관문 등용문 뜻

역사상식 (용어)

출세의 관문 등용문 뜻

 

 

 

등용문 이란

용문에 오른다는 뜻으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크게 출세하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용문은 중국 화허 강 상류에 있는 협곡의 이름입니다.

이 협곡은 물살이 너무 거세어 보통 물고기는

도저히 강물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등용문은 바로 이 용문을 거슬러 오르는

데 성공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용문을 거슬러 올라 용이 되는 물고기에

비유하여 어려움 끝에 출세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을 등용문 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주로 과거에급제하는 것을 등용문 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 뜻이 확장되어

입신 출세의 관문,특정 분야의 일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상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불가사의 유래 뜻 도저히 이해가 안되

역사상식 (용어)

불가사의 유래 뜻 도저히 이해가 안되

 

 

 

 

 

원래 불가사의는 불교 용어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말합니다.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합니다.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처럼 끝이 없고 그 몸은

불가사의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의 몸이나 지혜,가르침은 불가사의하여

중생의 몸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을 뛰어난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를 다른 말로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것,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한한 것을 말할 때 주로 쓰임니다.

 

 

 

 

 

 

 

 

 

철면피 란 쇠처럼 두꺼운 낯가죽

역사상식 (용어)

철면피 란 쇠처럼 두꺼운 낯가죽

 

 

 

철면피는 "무쇠처럼 두꺼운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에 왕광원이라는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듯

온갖 아첨을 마다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리 무례한 짓을 하여도

화를 내기는커녕 낯간지러운 아펌만 늘어놓았습니다.

 

 

어느 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술에 취하여

왕광원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러자 왕광원은 채찍을 맞으면서도 이 고관대작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꼴을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말을하였습니다.

 

 

"광원의 낯가죽은 두껍기가 열 겹의 철갑 같다"

이러한 일화로 인하여 철면피라는 말이 생겼답니다.

 

 

 

 

 

함흥차사 뜻 의미 한번가면 깜깜 무소식

역사상식 (용어)

함흥차사 뜻 의미  한번가면 깜깜 무소식

 

 

 

 

함흥차사란

심부름을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 소식이 없는

경우에 쓰이는 말입니다.

 

 

함흥차사의 유래는

조선을 세운 태조 , 이성계는 첫째 왕비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이방원 (첫째 왕비의 다섯번째 아들)이

둘째 왕비의 두 아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둘째 아들인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후 이방원은 정종에게서 임금 자리를 물려받아

왕(태종)이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여러 번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어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화가 풀리지 않은 이성계는 차사가 오는 대로

잡아 죽이거나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화 때문에 심부를을 갔다가 소식이 없는

경우나 늦게 온 사람을 함흥차사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최제우 동학창시 (동학 천도교)

역사상식 (용어)

최제우 동학창시

 

 

19세기 후반인 25대 임금 철종 때

조선은안팎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외척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면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착취 속에서 백성들은 고통받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이 늘어나고 유교와 불교는 타락하여

사회지도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쯤 최제우는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10여 년간 수도한 끝에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합니다.

 

 

 

 

 

 

 

동학은 성리학과 불교를 거부하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여 천주교도 배격하는 새로운 민족 종교 였습니다.

 

그래서 서학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동학이라

하였지만 유고, 불교, 도교와 천주교의 교리까지

흡수한 종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답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내세워 농민들과 많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답니다.

 

즉 동학은 당시의 유교적 윤리와 양반 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을 내포하고 잇었답니다.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조정은 사악한

가르침으로 세상을 어지럽힌고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864년에 최제우는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제2대 교주 최시형이 교리를 정리하고

동학을 이끌었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제3대 교주 손병희 때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답니다.

 

 

 

* 동학은 샤머니즘과 도교에 가까워 부적과

주술을 중시하였습니다.

 

 

* 수운 최제우는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천도교 포교용

가사집인 용담유사 등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거란족을 물리치다)

역사상식 (용어)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거란족을 물리치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936년)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답니다.

이후 고려는 송나라와 가가이 지내며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답니다.

 

이때 북쪽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나라가 이었습니다.

고려의 북진정책을 경계하던  거란은 먼저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993년 거란은 소손녕의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한답니다.

그러자 서희가 소손영과 담판하여 거간군을 철수시키고

강동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답니다.

 

 

1010년에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제2차 침입을 한답니다.

강조의 패배로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귀주에서 태로를 막자 거란은

강동6주의 반환을 조건으로 철수를 하게 된답니다.

 

 

 

 

 

 

 

 

 

 

 

1018년에 거란은 고려가 강동3주를 반화하지 않자

소배압의 10만대군으로 제3차 침입을 하게 됩니다.

이때 거란군의 진입로를 예측한 강감찬장군은

흥화진에서 쇠가죽 수백장을 꿰메어 냇물을

막아 놓고 인근 산속에 숨어 적군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거란군이 냇물을 건너자 일시에 막았던

물을 흘려보내 혼란에 빠뜨린 뒤 공격하여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란군은 계속 진군하여 개경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협공으로 후퇴를 하게

된답니다.

 

 

 

 

 

귀주에 이른 거란군은 다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구에게 대패하였는데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이들은 수천

명뿐이었습니다.

 

 

즉, 귀주대첩이란 1919년에 강간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전투를 말한답니다.

 

 

 

 

 

거란족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악티움해전)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역사상식 (용어)

(악티움해전)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44년 때,

로마 황제를 꿈꾸던 카이사르 (시저)는

공화파인 브루투스 등에 의하여 암살되었습니다.

 

이때 카이사르의 유서에 따라 양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곧 후계자로 떠오른답니다.

그런데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부장이었던 안토니우스,

장군 레피두스와 함께 동맹하여

로마를 다스렸답니다.

이것을 제2회 삼두정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레피두스가 곧 권력을 잃자 옥타비아노스와

안토니우스는 심하게 대립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동반 원정 길에 올랐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속주들을 자기마음대로 선물하고

그녀와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로마의 여론이 들끊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31년에 이집트에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악티움 앞바다에서

옥타비아누수의 로마군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것을 악티움해전 이라고 한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 악티움해전에서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하였답니다.

 

 

 

 

 

 

 

 

 

 

잉카문명 (아스텍 멸망)

역사상식 (용어)

잉카문명 (아스텍 멸망)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신항로 개척에 앞장서

세계 교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에스파냐는 서인도 제도와 중남미로 진출하고

포르투갈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신대륙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답니다.

 

 

특히 중앙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진출한

에스파냐 같은 경우 현재의 멕시코 지역의

아스텍과 페루 지역인 잉카를 멸망시키고

많은 양의 금과 은을 유럽으로 가져갔답니다.

 

 

 

 

 

잉카문명의 아스텍족은 고대의 인디언 부족으로

13세기 말에 멕시코 고원에 문명을 이루며

살았답니다.

 

아스텍족은 신전을 짓고 태양신과 조상신을

섬기며 살았답니다.

이들은 뛰어난 직물 염색 기술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1520년에 에스파냐의 귀족인

코르테스가 수백명의 군인들과 싸우다

끝내 아스텍은 멸망하고 말았답니다.

이로 인하여 잉카문명이 멸망하고 만답니다.

 

 

 

잉카족들은 10세기경 부터 안데스 산맥의 고원 지대인

현재의 페루를 중심으로 잉카문명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잉카족들은 직물과 금세공이 뛰어났으며

완벽한 관계시설을 갖추어 농사를 지었답니다.

발달한 토목 기술로 도로와 수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들의 종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숭배의

다신교 였답니다.

 

그렇지만 1533년에에스파냐인 피사로가 이끄는

군인들의 침략에 대항 하였으나

패하여 잉카문명을 멸망하고 말았답니다.

 

이후 잉카인들은 계속 저항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금광의 노동자나 사탕수수 노동자로 살았답니다.

 

 

 

 

 

 

무정부주의 (아나키즘) 이란

역사상식 (용어)

무정부주의 (아나키즘) 이란

 

 

무정부주의 (아나키즘)란 모든 정치 조직과 권력,

사회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사상을 말한답니다.

 

 

 

 

 

무정부주의가 하나의 사상으로 등장한것은

18세기 말부터 입니다.

그러다 산업 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확대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커지고 노동자들이 억압을 받자

노동과 사회운동으로서 19세기 후반부터

주목을 받게 된답니다.

 

이처럼 무정부주의도 사회주의의 일종이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이론적 차이와

실현 방법을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은 선한 존재지만

관습,법 ,권력 따위가 타락시킨다고 보고 없앨것,

사유 재산 때문에 인간의 타락과 착취가 이러우지니

인정하지 말것,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할수 있으니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국가는 해체할것 ,

사회 억압적 요소를 제거할 때 조직화된

혁명보다는 자생적이고 대중적이여야 한다는

것등을 주장했습니다.

 

 

 

 

 

 

 

 

무정부주의는 개인적 무정부주의, 집산주의적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등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모두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었는다는 믿음 아래 자유와 평등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상입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였답니다.

 

 

 

 

 

* 무정부주의 사상가이자 러시아 바쿠닌은 에스파냐,

이탈리아,러시아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무정부주의는 1920년 경부터

독립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그리고 대륙봉쇄령

역사상식 (용어)

나폴레옹 그리고 대륙봉쇄령

 

 

공포 정치 이후 프랑스에서는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 불안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 사령관으로

국민들에게 인기 있던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3명의

통령이 정치를 맡는 통령정부를 세워

정권을 장악 하였습니다.

그리고 1804년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황제로 즉위를 하게 된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함깨  동맹을

맺고 대항을 하였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5년 에스파냐 함대와

연합하여 영국을 공격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에게

패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륙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등을

굴복 시키는 등 유럽을 정복해 나갔답니다.

 

 

 

 

한편 1806년에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영국과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린답니다.

 

나폴레옹은 성과가 없자 1812년 대륙봉쇄령을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하여 원정에

나섰으나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실패한답니다.

 

그러다 1814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등의

동맹군공격을 받아 파리가 점령되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유배되었답니다.

 

 

 

* 1804년 공포된 나폴레옹 법전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법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탈출을 하여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 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답니다.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 유래

역사상식 (용어)

대한민국 국기 태극기 유래

 

 

 

태극기의 유래는 1876년에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은 운요호에 일본의 국기가 계양되어

있었는데 어째하여 포격을 가하였냐고 따졌답니다.

 

당시 국기가 없었던 조선은 당황을 하였고

이일을 계기로 조정에서 국기를 만들자는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쯤 청나라가 청의 국기를 본받아 만들것을

요구하자 이에 분개한 고종은 태극원과

사괘를 그려 국기로 정하라는 명을 내렸답니다.

 

태극 문양은 예로부터 여러 용도로 사용되어

왔고 영조 때에는 왕세자 책봉례에서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태극 도형리가

최초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태극기가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882년 수신사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박영효 일행은 당장에 게양할

국기의 필요성을 느꼇답니다.

그리서 고종의 명으로 논의되던 태극 문양의 국기를

그려 사용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1년되 1883년에 고종은 태극기를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 공포 하였습니다.

 

이후 태극기는 도형의 통일성 없이 사용되다

1948년에 정부 수립 후 대한 민국 국기로 제정되어

도안과 규격이 통일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문교부 고시로 현재의 형태로 확정되었답니다.

 

 

 

 

 

* 애국가 같은 경우 20세기 초에 작자 미상으로

가사가 민간에 펴져 있었는데 1936년 안익태 선생이

곡을 붙였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결정되었답니다.

 

 

이성계 위화도회군

역사상식 (용어)

이성계 위화도회군

 

 

고려말 왕권이 약화되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1368년에는 주원장이 베이징을 함락하여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쫓고 중국을 통일하여

명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때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새로운

무인세력들이 등장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 입니다.

 

 

 

 

 

 

우왕 때인 1388년 명나라는 고려가 계속

원나라와 관계를 지속하자 쌍성 총괄부

관할 지역인 철령 이북의 땅을 갖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답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자는 최영측과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는

이성계 측으로 갈라졌으나 결국 정벌로

결정이 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고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진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위화도회군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허락하지 않자

요동정벌에 뜻이 없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최영의 진압군을 물리치고

우왕을 내쫓는 뒤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즉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1392년

조선왕조 창건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치와 군사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도전,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들이 그와 뜻을 같이 하였기 때문 입니다.

 

 

 

*  이성계는 최대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자

공양왕을 폐위 시킨뒤즉위 하였습니다.

 

 

 

강화도조약 (운요호 강화도 침입)

역사상식 (용어)

강화도조약 (운요호 강화도 침입)

 

 

 

1863년 조선26대 임금으로 고종이 즉위를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섭정하게 된답니다.

 

대원군은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정계에서 내쫓고 붕당의 근거지로서

백성을 괴롭히던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정치를 펼쳤습니다.

 

 

 

 

 

 

 

한편 서구의 열강들에 의하여 청나라와 일본이

경제적으로 침략당하는 것을 본 대원군은

외세에는 통상 거부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쯤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춘 일본은 조선을

정벌하여 대륙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1875년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한 일이 벌어진답니다.

이에 조선군은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도를 점령하여 방화와

약탈을 한 뒤 돌아갔답니다.

 

그리고는 운요호에 먼저 발포한 것을

문제 삼아 통상을 강요 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의 통상 활동과 조선 연해의 자유로은

측량을 허용하게 된답니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불평등한

조약이었답니다.

 

 

 

 

 

 

 

* 강화도조약은 병자수호조약 , 한일수호조약등으로

불립니다.

 

 

* 대원군은 통상 거부 정책으로 1866년엔 병인양효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데탕트 (긴장 완화 정책)

역사상식 (용어)

데탕트 (긴장 완화 정책)

 

 

 

데탕트란 적대 관계에 있던 두 진영이나 나라들 사이에

긴장이 풀려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태나 그것을 지향하는 정책을 말한답니다.

 

 

 

서유럽 구가들의 유럽 경제 공동체 조직, 일본의 경제적 성장,

제3세계의 대두,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자유화, 중국과 소련의 분쟁등

이념보다는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나라들이 늘면서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답니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에서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평화공존을 추구했는데

이를 "데탕트"라고 한답니다.

 

 

 

 

 

1959년에 소련의 지도자 흐루시초프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이후 긴장 완화를 위한 여러 가지 렵정과 조약 체결,정상회담등의

노력들이 쏟아져 나왔답니다.

 

 

1963년 미국,영국,소련의 부분적인 핵실험정지조약 체결,

1968년 핵환산금지조약 조인, 1970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닉슨 독트린" 발표와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제한협정 체결등이 그것 이랍니다.

 

그리고 1972년에 닉슨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함으로서

데탕트가 실현된답니다.

 

 

 

 

 

 

*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는 붕괴 된답니다.

 

 

* 1985년에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데탕트를 형성하였습니다.

 

 

 

 

 

 

 

 

 

 

장미전쟁 (가문들의 전쟁)

역사상식 (용어)

장미전쟁 (가문들의 전쟁)

 

 

 

점심을 먹고자 지나가는 길에 시들시들해지는

장미가 보여 사진을 한번 찍어 보았습니다.

떡 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장미꽃 찍은 김에

장미전쟁에 대하여 포스팅을 해봅니다.

 

 

 

 

 

 

"장미전쟁" 이란 영국의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사이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였던 싸움을 말한답니다.

 

 

당시 영국은 랭커스터가의 헨리6세가 왕이였답니다.

그런데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린6세의 할아버지

헨리4세가 요크가의 리처드2세를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으나

왕위 계승권은 자신에게 있다며 반기를 들었답니다.

 

 

이에 두 가문에 동조하는 귀족들까지 합세를 하여

내전으로 확대가 된답니다.

 

이것이 장미전쟁의 시작인데

랭커스터가는 붉은 장미를 요크가는 흰장미를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한 데에서 장미전쟁 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1460년에 요크공작 리처드는 전사하고

그의 다들 에드워드가 이듬해 랭커스터군을 무찌르고 런던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어서 워릭 백작의 지지로 헨리6세를 내쫓고

즉위하니 그가 바로 에드워드4세 입니다.

 

 

이리하여 장미전쟁은 끝이 난 듯 보였으나

워릭과 에드워드 4세간의 권력 다툼으로 계속 전쟁이 이어진답니다.

 

워릭이 에드워드4세를 내쫓고 다시 헨리6세를

왕위에 앉혔기 때문이랍니다.

이때 네덜란드로 도망가 세력을 키우던 에드워드4세는

1471년에 영국으로 쳐들어와 워릭을 물리치고

헨리6세를 살해한 뒤 다시 왕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1485년에 프랑스왕의 도움으로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쳐들어와 다시 장미전쟁은 시작되었답니다.

 

헨리 튜더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당시 영국의 왕

리처드3세를 전사시키고 승리하여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은 끝나게 된답니다.

 

 

 

 

 

 

 

* 장미전쟁으로 귀족과 기사의 세력이 꺽이고

왕권이 강화되어 영국은 절대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답니다.

 

 

 

* 헬리튜더는 헨리7세로 왕위에 올라 세러이

튜더왕조를 열었습니다.

 

 

 

 

 

 

 

 

 

30년동안 왕권을 위하여 전쟁을 하는걸 보니

여기나 저기나 왕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서로들 하려고 하는걸 보니 ㅎㅎ

 

 

 

 

폴리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역사상식 (용어)

폴리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기원전 8세기경 부터 그리스에서는 작은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답니다.

 

다시말하면

고대 그리스는 에게 해 주변에 위치한 많은 고시 국가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합국 이였답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자유로운 시민의 공동체인

도시 국가를 폴리스 라고 한답니다.

 

당시에는 이런 폴리스가 2백여개나 존재 하였다고 합니다.

 

 

 

 

 

각각의 폴리스는 거의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일단 중심에는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 언덕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부에는 튼튼한하게 성벽을 세웠고

시민들이 시장을 보거나 정치적인 의견을 나누던

광장인 " 아고라"가 있었습니다.

 

 

 

 

 

 

폴리스들은 높고 험한 산이 많아서 서로의

교류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족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고 정치적인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4년마다 올림피아 제전을 열었답니다.

 

 

하지만 서로의 끊임없는 대립과 싸움으로 인하여

기원전 4세기경 쇠티하게 된답니다.

 

가장 대표적인 폴리스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답니다.

 

 

 

 

 

* 그리스의 폴리스는 기원전 4세기 말

마케도니아에 정복되어 명말하게 됩니다.

 

 

* 폴리스는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다음에 있는 아고라가 이런뜻의 아고라 였군요. ㅎㅎ

세로운걸 배우네요~